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5년 객군 반란 (문단 편집) === 반란군 토벌 === 5월 21일, [[허잉친]]이 지휘하는 당군[* 쑨원 사후 [[황포군관학교]] 교도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군대.] 제1여와 천밍수의 광동군 제1여가 매현을 출발하여 광저우로 향했다. 양시민과 류전환은 군대를 출격시켜 토벌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광구철도[* 광저우-구룡.], 광삼철도[* 광저우-삼수.], 월한철도[* 광저우-한커우.]의 노동자들 및 선창의 잡부들이 [[바실리 블류헤르]]와 랴오중카이의 선동으로 파업을 일으켜 군벌군에게 저항하면서 군벌군들은 이동이 불가능해졌다. [[중국공산당]] 광동구 위원회는 라액농(羅亦農)을 대표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중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한편 철갑차대를 구성하여 토벌에 협조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홍콩파업위원회 소속 규찰대를 비롯한 노동자, 농민협회 회원들이 정찰과 물자 수송을 지원하여 토벌군을 도왔고 부상자 구호와 적군 교란 등에 협조했다. 본격적인 광서군과 운남군 토벌을 앞둔 5월 30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 각군의 독자적인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군령의 통일, 2. 민정의 통일을 통해 군대의 인사와 행정권에 대한 간섭 엄금, 3. 재정의 통일과 군수의 독립을 통해 각 군대가 재정을 분할하고 독점하던 악습의 엄금, 4. 모든 군대는 정치훈련을 통해 주의와 기율을 갖춘 혁명군대로 탈바꾸어야 한다는 <정식군대방안>(整飾軍隊方案)을 통과시키고 이를 대리대원수 후한민에게 집행할 것을 권고했다. 6월 3일, 양시민과 류전환은 공개 반란을 선언하고 병기 공장을 점령하고 세금을 탈취했으며 광동성 성장 공서, 재정부 기관을 점령하였다. 토벌군은 장목두에 집결하여 당군 제1여를 선두로 석룡을 점령했다. 6월 6일 벌어진 격렬한 전투는 6월 7일까지 이어졌으나 폭풍우로 한시간 동안 중단되었다. 마침내 1,000명의 당군 병력이 소련 고문의 지휘를 받아 도하에 성공하여 석탄을 함락시켰다. 군벌군은 조명시설, 통신시설을 장악하고 참호와 바리케이드를 구축하는 한편 용안동과 광구철로에 병력을 전개했다. 6월 9일, 토벌군은 주력을 용안동에 투입하는 한편 일부병력을 광구철로 연변으로 진격시켰다. 6월 11일 오후, 용안동이 함락되었으며 6월 12일 아침까지 광저우의 요충지가 모두 토벌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6월 12일 장제스는 광저우 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광저우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군벌군은 수구령에서 저항했으나 토벌군은 해군 함정과 항공대의 지원 사격을 받아가며 맹공을 퍼부었고 운남군의 조성량이 전사하자 군벌군은 붕괴되었다. 오후에 토벌군이 광저우 시내로 진주하자 군벌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2만에 달했다. 노획무기는 소총 1만 6천정, 기관총 120정, 캐넌포 20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당군 사령관 겸 광저우 위수사령관으로 활약한 장제스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으며 [[바실리 블류헤르]]의 명망도 높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